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가정을 이루겠다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선언하고, 다짐하는 결혼식.
하지만 결혼은 현실이라고 하죠. 실제 결혼식만 해도 웨딩홀, 스튜디오 촬영, 드레스, 메이크업 등 평균 비용이 2000~3000만 원 가량 소요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혼식 비용 때문에 선뜻 결혼을 하지 못하는 커플들이 생각보다 많다고 합니다.
이런 어려운 사람들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겼던 백낙삼 대표는 무려 55년 동안 무료 예식장을 운영하며 1만 4천쌍의 부부를 탄생시켰다고 합니다.
하지만 백낙삼 대표가 지난해 갑작스럽게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건강상의 문제가 생겼고, 결국 지난 4월 28일 하늘의 별이 되었습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은 55년간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온 예식장이 없어지는 것에 아쉬움을 표했는데요.
다행히 아들 백남문 씨가 아버지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하던 일을 그만두고 예식장의 운영을 맡기로 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최소한의 사진 비용을 제외하고 예식장 비용은 무료료 지원한다고 밝혔습니다.
신신 예식장의 시작
1967년 경상남도 마산시의 한 3층 건물에는 창원에서 가장 오래된 ‘신신 예식장’이 열었습니다.
이 결혼식장은 놀랍게도 무료로 운영되는 곳이었는데요.
신신 예식장의 백낙삼 대표와 최필순 여사가 무료 예식장을 운영한데에는 남다른 사연이 있었습니다.
백낙삼 대표는 2021년 12월 한 방송에 출연해 그 이유를 밝혔는데요.
“제가 결혼에 한이 맺혔다. 저처럼 돈이 없어서 결혼 못하고 애태우는 분들 결혼 시키고 나는 사진값만 받기로 했다”며 무료 예식장을 운영하게 된 배경에 대해 알렸습니다.
처음 백낙삼 대표는 사진관을 운영했다고 하는데요. 자신의 어려운 형편처럼 돈 때문에 결혼을 망설이는 사람들이 많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합니다.
단칸방 하나에 13명의 가족들이 살던 그에게 결혼은 꿈만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하는데요.
결혼식을 미루면서 돈을 벌어 어렵게 돈을 마련해 결혼을 했고, 돈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하며 피나는 노력을 한 끝에 1967년 3층 건물을 사서 ‘신신 예식장’을 열었습니다.
처음엔 사진관을 한다는 생각으로 결혼식은 무료로 진행하는 사업을 구상하면서 ‘신신 예식장’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예식장을 시작 후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초창기에는 하객들이 앉을 의자가 없고, 드레스 1벌로 예식을 올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례가 아쉽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자 30대의 젊은 백낙삼 대표는 직접 주례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주로하는 주례에 젊은이가 한다고 우습게 생각할까봐 주례를 위해 공부에 공부를 거듭해 전문가 수준의 주례를 봤다고 합니다.
또한 최필순 여사는 남편을 도와 신부의 부케를 만들고, 예식장 관리, 폐백 준비, 촬영 보조 등 다양한 일을 척척 해냈습니다.
아버지의 발인에도 진행된 예식
백낙삼 대표는 2023년 4월 28일 향년 91세의 나이로 하늘의 별이 되었습니다.
무료 예식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백낙삼 대표의 1남 4녀 중 넷째 백남문 씨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버지가 쓰려졌던 지난해 4월부터 직장도 그만두고 어머니와 함께 예식장 운영을 해왔습니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아버지의 뒤를 이을 생각에 사진을 전공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아버지가 사용하셨던 휴대전화와 사진기를 계속 사용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지금까지도 아버지의 번호로 연락하는 사람들이 많고 또 물건들을 만지며 아버지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 밝혔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닮아 책임감이 상당히 컸는데요.
그래서 아버지의 발인 당일에도 미리 예정된 예식을 진행했습니다.
백남문 씨는 최소한의 사진값만 받고 예식을 무료로 진행하고 있으며, 만약 사정이 좋지 않다면 사진값 조차 받지 않으며 운영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제가 맡아서 열심히 하고 있으니 절대 걱정마시라. 저는 아버지가 했던 일 그대로 계속 봉사활동 하겠다는 것을 아버지께 꼭 전해드리고 싶다”며 앞으로의 포부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백낙삼 대표는 별세 전 예식장 한켠에 언제 쓸지 모르는 영정사진을 미리 찍어두기도 했는데요.
사진 뒤에는 55년간 무료 결혼식을 진행하며 봉사했던 그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짦은 유언을 적어놓기도 했습니다.
“아들 딸, 손자 손녀들이여! 비록 저녁거리 없이 시작한 살림이었지만 우리 부부는 한없이 원없이 가족과 더불어 한평생을 즐겁게 살았노라. 이제 오복을 누리다가 생을 마감하노니 너희들은 오늘 너무 슬퍼하지 말고 호상이니 웃음꽃을 피우며 경사스럽게 맞이하라”는 글을 적어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