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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생의 한” 부잣집 도련님 삼성 이병철이 흙수저 출신 정주영에게 평생 열등감 느꼈던 한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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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대한민국 대표기업 현대의 창업주입니다.

그는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과 함께 한국 재계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데요.

정주영 회장과 이병철 회장은 활동 시기가 비슷해서 종종 비교되어온 라이벌 관계이지만, 두 사람의 자라온 과정은 많이 달랐습니다.

가난하게 자랐던 정주영 회장 달리 이병철 회장은 남부러울 것 없이 유복하게 자라왔는데요.

그래서 정주영 회장은 생전에 이병철 회장의 여유로운 환경을 부러워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한편, 이병철 회장도 정주영 회장에게 유일하게 부러워하던 것이 한 가지 있었는데, 바로 자녀들의 학력이었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지금으로 따지면 초등학교만 졸업한 것이 평생의 한이었다는데요.

여섯 번째 아들 정몽준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보내면서, 학력에 대한 열등감을 털어내고, 다른 재벌가와 만날 때도 아들이 서울대학교에 간 것을 자랑했다고 합니다.

반면에 이병철 회장의 자녀들은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이병철 회장은 정주영 회장에게 열등감을 느꼈다는데요.

아들 이건희 회장도 서울대는 가지 못하고 연세대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하여 와세다대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이병철 회장은 “우리 집안에는 왜 서울대 간 사람이 없냐”며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었다고 전해집니다.

결국 그의 손자 이재용 회장은 서울대 동양사학과에 입학해 꿈을 이뤘지만 안타깝게도 이병철 회장 사망 후라 그 모습을 직접 볼 수는 없었죠.

정주영은 1915년생으로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이라는 힘겨운 시기를 보낼 때, 현대그룹을 세계적으로 성장시킨 기업가입니다.

당시 가난했던 대한민국에서 자동차와 조선, 건설업 등을 한국 경제를 뒷받침할 만큼의 주력 산업으로 키워냈습니다.

정주영은 불굴의 도전 정신을 지닌 것으로 아주 유명합니다.

자본도 시설도 없던 상황에서 해외 투자회사를 찾아서 큰돈을 빌려 조선소를 지어서 세계 1위로 만들었습니다.

또, 1970년대 석유파동이 일어났을 때는 ‘낮에 자고 밤에 일하면 된다’는 기발한 발상을 가지고 중동에 진출하여 오일머니를 벌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초등학교만 간신히 졸업하고, 아버지 소를 도둑질해서 판돈으로 서울로 올라왔는데요.

그는 첫 직장이었던 쌀가게에서 매일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서 성실히 일했습니다.

저녁에 쌀가게가 문을 닫고 나면 다른 직원들은 장기를 두거나 화투를 치면서 놀았지만, 정주영은 그 옆에서 책을 읽으며 자기 계발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당시 쌀가게 주인의 가족들은 청년 정주영에 대해서 다른 직원들과 다르게 정주영은 밤이 되면 항상 책을 붙들고 있었다고 기억했습니다.

쌀가게 주인은 이런 정주영을 눈 여겨 보다가 나중에는 자신의 아들 대신 성실하게 일하는 정주영에게 가게를 팔았다고 합니다.

정주영이 벼룩으로부터 도전정신을 배웠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습니다.

과거 막노동을 하며 노동자 숙소에서 지내던 정주영은 벼룩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하루는 침상의 다리 네 개를 물 담은 양동이에 담가 놓아 벼룩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했는데요.

그러나 며칠 후 또다시 벼룩에게 물리기 시작해서 불을 켜보니, 벼룩들이 벽을 타고 천정으로 올라간 다음, 사람에게 떨어지는 방식으로 침상위로 올라왔던 것입니다.

정주영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 하는 벼룩의 노력을 보며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하지 못할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근면성실함과 도전정신을 습득하며 자란 정주영은 현대그룹이라는 초거대기업을 키워냈는데요.

그는 회사를 경영하면서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남다른 창의력을 발휘하여 해결했습니다.

정주영은 지난 1984년 충남 서산에서 간척지 사업을 진행하면서 방조제 공사를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서산 앞바다의 조수 간만의 차가 커서 바닷물의 속도가 매우 빨라 방조제 공사를 진행하지 못하는 난관에 부딪혔는데요.

이 때 정주영은 폐 유조선을 침몰시켜서 물길을 막고 유속을 늦추자는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내놓았습니다.

물을 막기 위해서는 20만 톤 이상의 암석이 필요했던 상황이었지만, 정주영의 번뜩이는 아이디어 덕분에 공사기간을 9개월이나 단축하고 공사비용을 280억 원이나 아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방식은 이른바 ‘정주영 공법’으로 불리며, 뉴스위크지와 뉴욕타임스에 소개될 정도로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정주영은 도전정신으로 자본도 기술도 시장도 제대로 없었던 시절에 무에서 유를 창조해왔습니다.

그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정신과 창의력은 아직까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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